
블랙윙이 특별한 이유는 무엇일까
"새 연필을 찾았어. 이제껏 써본 것 중 최고야. 값이 세 배는 더 비싸지만 검고 부드러운데도 잘 부러지지 않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존 스타인벡이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남긴 이 문장은 블랙윙 연필의 본질을 정확히 표현합니다. 저도 처음엔 "연필 하나에 4,000원이나?"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종이 위에 대는 순간 그 의미를 알았습니다. 정말로 활강하듯 미끄러지더라고요.
블랙윙 연필의 가장 큰 특징은 실크처럼 부드러운 흑연입니다. 일반 연필은 필압을 줘야 진한 선이 나오지만, 블랙윙은 거의 힘을 주지 않아도 선명한 검은색이 나와요. 이는 블랙윙만의 특수 흑연 배합 기술 덕분인데, 3B에서 4B 정도의 진한 심을 사용하면서도 잘 부러지지 않는 강도를 유지합니다. 만년필 쓰듯이 슥슥 써내려갈 수 있어서, 오랜 시간 필기해도 손목이 덜 피곤합니다.
블랙윙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더욱 흥미롭습니다. 1930년대 미국 에버하드 파버(Eberhard Faber)사에서 첫 생산을 시작했고, 당시 광고 슬로건은 "Half the Pressure, Twice the Speed(절반의 압력, 두 배의 속도)"였습니다. 존 스타인벡뿐 아니라 척 존스, 레너드 번스타인, 스티븐 손드하임, 어니스트 헤밍웨이, 월트 디즈니, 심지어 존 레논까지 블랙윙을 애용했다고 알려져 있어요.
그런데 1998년 생산이 중단되면서 블랙윙은 전설이 되었습니다. 중고 거래 시장에서 한 자루당 수만 원에 거래될 정도였으니까요. 다행히 2010년 팔로미노(Palomino)사가 블랙윙을 복각 생산하면서 우리도 다시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복각 과정에서 원본 제조법을 최대한 재현하려고 노력했고, 오늘날의 블랙윙은 과거의 명성에 걸맞은 품질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가장 눈에 띄는 디자인 요소는 교체 가능한 지우개 시스템입니다. 일반 연필처럼 지우개가 고정된 게 아니라, 페룰(ferrule)이라는 금속 부분을 밀어서 지우개를 빼고 끼울 수 있어요. 골드, 실버, 코퍼 등 페룰 색상도 모델마다 다르고, 지우개 색상도 화이트, 핑크, 블랙 등 다양합니다. 삼나무 배럴에 각인된 문구와 디자인은 그 자체로 하나의 작품 같습니다.
블랙윙 모델별 라인업
블랙윙을 처음 구매하려는 분들이 가장 고민하는 부분이 "어떤 모델을 살까?"입니다. 각 라인업마다 경도와 용도가 다르기 때문에, 본인의 사용 목적에 맞는 제품을 선택하는 게 중요해요. 개인적으로 여러 모델을 써본 결과를 바탕으로 자세히 설명드리겠습니다.
블랙윙 602는 가장 유명하고 역사가 깊은 모델입니다. 회색 바디에 골드 페룰이 달려있고, 'Half the Pressure, Twice the Speed'라는 문구가 각인되어 있어요. 경도는 B 정도로, 일반적인 필기에 가장 적합합니다. 존 스타인벡이 평생 애용했던 바로 그 연필이 이 모델이죠. 일기를 쓰거나 노트 필기를 할 때 사용하면 딱 좋습니다. 처음 블랙윙을 접하신다면 602부터 시작하시는 걸 추천드려요.
블랙윙 펄은 2B 정도의 경도로 필기와 드로잉 중간쯤 됩니다. 진주처럼 빛나는 화이트, 핑크, 블루 컬러 바디에 실버 페룰이 달려있어 시각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라인이에요. 'Balanced(균형잡힌)'이라는 컨셉답게 모든 용도에 무난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저는 손님 접대용 노트나 특별한 편지를 쓸 때 펄을 사용하는데, 받는 사람도 "와, 이 연필 뭐예요?"라며 관심을 보이더라고요.
블랙윙 매트는 3B-4B의 부드러운 경도로 예술가들에게 사랑받는 모델입니다. 매트 블랙 바디에 코퍼(구리색) 페룰이 달려있어 묵직하고 프로페셔널한 느낌이 나요. 스케치나 드로잉을 할 때 진한 선이 필요하다면 이 모델이 최고입니다. 'Soft(부드러운)'라는 이름답게 정말 버터처럼 부드럽게 그어지는데, 대신 심이 빨리 무르기 때문에 자주 깎아줘야 합니다.
블랙윙 내추럴은 HB 정도의 단단한 경도로, 동양권 문자 필기에 가장 적합합니다. 다른 블랙윙 모델들이 영어 필기체에 최적화되어 있다면, 내추럴은 한글처럼 획이 많고 작은 글씨를 쓸 때 좋아요. 나무 본연의 색을 살린 내추럴 우드 바디에 골드 페룰이 조합되어 있고, 'Extra Firm(매우 단단한)'이라는 표현답게 심이 잘 무르지 않습니다. 실무용 필기나 공부할 때 사용하기 딱입니다.
최근에는 블랙윙 매트 레드와 블랙윙 매트 그린도 출시되었습니다. 기본 매트와 경도는 같지만 컬러풀한 바디로 선택의 폭을 넓혔어요. 특히 선물용으로 인기가 많습니다.
블랙윙 한정판과 컬렉터 문화의 세계
블랙윙의 진짜 매력은 분기별 한정판(Limited Edition) 문화에 있습니다. 매 시즌마다 특별한 테마와 스토리를 담은 디자인의 연필이 출시되는데, 이게 정말 패션 브랜드의 시즌 컬렉션을 보는 것 같아요. 한정판은 해당 분기에만 생산되기 때문에 놓치면 구하기 어렵고, 그래서 컬렉터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습니다.
2025년 최근 출시된 독립서점의 날 기념 한정판(IBD 2025)은 책의 외형을 형상화한 디자인으로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책장을 넘기는 모습을 연필 바디에 표현했는데, 케이스 전면에도 같은 디자인이 인쇄되어 하나의 예술 작품처럼 보관할 수 있어요. 이 모델은 Firm 경도(B 상당)로 필기에 적합합니다.
과거 인기 있었던 한정판들을 살펴보면 스토리가 정말 다채롭습니다. Vol.725는 로드아일랜드 뉴포트 록 페스티벌을 기념해 검정과 빨강 그라데이션으로 디자인되었고, Vol.211은 국립공원의 아버지 존 뮤어를 기념해 아무런 도장 없이 나뭇결을 그대로 살린 모델이었습니다. Vol.292는 팝아트의 거장 키스 해링과의 협업 에디션으로 출시되어 순식간에 품절되기도 했죠.
블랙윙 LAB 시리즈는 실험적인 디자인을 시도하는 라인입니다. 2024년 11월에 출시된 LAB 11.29.24는 삼각형 단면의 연필로, 일반 원형 연필과는 완전히 다른 그립감을 제공합니다. 이런 실험적 시도가 블랙윙을 단순한 필기구가 아닌 '경험의 도구'로 만들어주는 것 같아요.
한정판을 수집하는 재미에 빠진 분들도 많은데, 사용하지 않고 케이스째 보관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물론 저는 "연필은 써야 제맛"이라고 생각하지만, 디자인이 너무 예쁘면 아껴두고 싶은 마음도 충분히 이해됩니다.
블랙윙을 제대로 즐기려면 액세서리도 함께 갖추는 게 좋습니다. 블랙윙 익스텐더(연필깎지)는 짧아진 연필을 끝까지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데, 알루미늄 재질에 블랙윙 로고가 각인되어 있어 그 자체로 소장 가치가 있습니다. 포인트 가드는 연필심 보호캡으로 실버, 골드, 매트블랙 색상이 있고, 가방에 넣고 다닐 때 심이 부러지는 걸 방지해줍니다.
가격은 기본 라인업이 낱개 3,500원에서 4,100원, 한정판은 4,500원에서 5,000원 정도입니다. 12자루 세트(1더즌)로 구매하면 조금 더 저렴하게 살 수 있어요. 일반 연필보다 확실히 비싸지만, 한 번 써보면 그 가격이 아깝지 않다는 걸 느끼실 겁니다.
다만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블랙윙의 부드러운 심은 장점이자 단점이 될 수 있어요. 한글처럼 획이 많고 작은 글씨를 쓸 때는 심이 빨리 뭉툭해져서 자주 깎아줘야 합니다. 그래서 휴대용 연필깎이를 항상 함께 가지고 다니시는 걸 추천드려요. 중요한 회의나 시험 같은 곳에서는 내추럴 라인을 사용하시고, 여유로운 글쓰기나 스케치에는 매트나 602를 사용하시는 식으로 상황에 맞게 구분하면 좋습니다.



 
                              
                             
                              
                             
                              
                            